시인 김소연은 <사랑, 그 불가항력의 낭비에 대한 보고서>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사랑은 하나의 점이다. 선이나 면처럼 이어져 존재하지 않고, 찰나 속에서만 존재한다. 우리가 타인에게 ‘사랑한다’고 고백하는 그 순간, 사랑은 휘발되고 없다. 그런 고백을 듣는 그 순간, 그 말을 해주는 사람의 깊고 수줍은 눈빛을 바라보다 보면, 그 사이 눈 몇 번 깜박이다 보면, 사랑한다는 실체는 아득한 신화 속으로 연기처럼 사라져버린다. 사랑은 다만 가장 강력한 자장을 내뿜는 찰나일 뿐이다 (마음사전 P. 163)
물 없이 알약을 삼켜야 할 때, (목구멍에서 위장으로 떨어지기까지) 혹시 알약이 중간에 기도를 막진 않을까하는 걱정과 제대로 위장에 들어갔는지에 대한 염려와 아무래도 목구멍 어딘가에 걸려서 안 내려가는 것 같다는 불길함에 휩싸이는, 딱 그 느낌이었다. 그녀의 글은.
잘 모르겠고 그래서 그냥 마음 흘러가는 대로 놔두고 싶고 심지어 생각하기 귀찮을 때도 있는데, 그것이 누군가의 언어로 종이에 박힌 걸 보면 순간 찢어버리고 싶은 욕구가 들곤 한다. 예를 들면, 그 페이지를 갈기갈기 찢어 물에 푼 다음 다시 건조시켜 재생지를 만들거나, 인쇄된 활자가 문드러질 때까지 반복적으로 접거나, 단어를 오려 엉망진창인 문장으로 재탄생시키는 것 등이다. 이런 치기어린 신경증적 반응 때문에 그것에 관련된 책들은 의도적으로 기피해 왔다. 주로 사회과학 서적을 읽는 습관은 엄밀히 말하면 내가 그 분야에 관심이 많기 때문이 아니라 대안으로 선택되었다는 것이 더 적절하겠다.
그럼에도 그것, 사랑을 꺼내 들었다. 심정적 변화에 따른 것인지, 충동적으로 어떤 감정에 휩쓸려 그런 건지는 모르겠다. 무턱대고 일단 읽고 싶었고, 그때 떠오른 사람이 ‘알랭 드 보통’이었다. 반지르르한 말로 포장된 것보다 그럴듯하게 ‘분석’한 책이 내겐 필요했다.
예상은 틀리지 않았다.
화자(그)는 애인에게 이별을 통보받으며 ‘자신만 생각하는 나르시시스트’, ‘모든 것에 늘 고압적이고 독선적인 태도’, ‘(상대방의) 요구에 귀 기울이지 않는 이기주의자’, ‘공감할 줄 모르는 사람’이란 비난을 듣는다. 실연당한 것도 모자라 덤으로 ‘네 자신을 알라’는 자기성찰 과제까지 떠안은 것이다. 그는 해결 방법으로 타인에 대한 전기(傳記)를 쓰기로 결심한다. 전기를 쓰다보면 그/그녀에 대해 이해하고 배려하고 공감하는 법을 배울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으로.
그런데 그 과정이 호락호락하지 않다. 화자(그)가 전기의 주인공으로 삼은 한 여자(이사벨)의 얘기를 듣다보니, 이전까지 참조했던 전기의 형식과는 맞지 않았던 것이다. 결국 그는 새로운 방법들을 시도해 나간다. 예를 들면, 전기에 등장하는 전형적인 가계도―혈통과 출생, 사망 날짜 등을 강조하는―가 아닌, 감정적 기질의 흐름에 따라 가계도를 그리는 것 등이다. (물론 엉망진창이지만 가계도만 봐도 가족의 특성을 한눈에 알아볼 수 있단 장점이 있다)
책은 기존의 전기쓰기 방식에 대한 고찰과 그녀(이사벨)에 대한 관찰이 씨실과 날실로 엮인 구성을 갖추고 있다. 그 사이 사이에 저자인 ‘알랭 드 보통’의 번뜩한 생각들이 숨어있는데, 다소 지루한 이사벨의 개인사는 건너뛰고 (알랭 드 보통의 페르소나라고 할 수 있는) 화자(그)의 분석을 눈여겨보는 재미가 쏠쏠하다.
인생을 A에서 시작하여 Z로 끝나는 알파벳에 비유하는 사람도 있을지 모르지만, 인생은 절대 그렇게 문법적인 속박을 받는 방식으로 경험되지 않는다. 오히려 철자에 자신이 없어 혼란에 빠진 아이의 시도와 비슷하다. Q에서 인생에 진입하여, D로 돌아갔다가, 거기서 관심이 S로 앞당겨지고, 전진하는 현재인 R에 머물다가, 주크박스에서 흘러나오는 노래나 까맣게 잊고 있던 발리 섬의 갈매기 이동 패턴에 관한 책에서 떨어진 사진에서 촉발된 연상 때문에 열다섯 살 때 일어났던 일을 찾으러 잠깐 G에 들를 수도 있다. (P. 34)
과연 ‘어떤 사람에 대해 쓴다는 것−전기’란 무엇일까. 한 사람의 출생과 사망을 A와 Z라 한다면, 파이를 스물여섯 조각으로 자르듯 A to Z까지 공평하게 할당하는 게 맞을까. 만약 삶의 방향을 바꾸는 전환점 F가 있다면, 인생은 다시 F에서 시작될 수도 있는 것이다. 때론 어떤 충격적인 사건 C에서 몇 년을 허송세월로 보낼 수도 있겠다. 이는 화자가 얘기한 ‘프루스트적인 순간’과 연결된다.
나는 과거를 익숙한 연대기에 따라 배치하는 것이 아니라, 프루스트적인 순간을 이용하는 새로운 방법을 도입하여, 삶의 장면들이 결정하는 계기를 이루는 냄새, 촉감, 소리, 사물을 따라가 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하기 시작했다. (P. 130)
프루스트적인 순간이라... 인생이 두꺼운 잡지책이라면, 어느 순간 찰나의 힘으로 한 페이지가 스르륵 펼쳐질 때의 느낌... (이를테면 내겐 비오는 날 젖은 흙냄새, 가늘게 뻗은 잎맥들, 햇빛에 반쯤 그림자를 띄운 흰 벽 같은 것이다. 이게 무슨 소리?ㅋㅋ) 하지만 이것이 과거의 어떤 에피소드와 겹쳐져 한편의 이야기를 만들더라도, ‘전기적 관점’에선 버려야 할 군더더기에 불과하다. 사회적으로 중요하다고 판단되는 출생/학업/취직/결혼/승진/명예/사망 등과는 거리가 멀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화자는 반대로 (어찌 보면 강박에 가까울 정도로) 상대방의 사소한 것들에 집착하고, 그 생각이 어떤 결과를 낳는지에 집중한다. 화자에겐 ‘그 사람의 세밀한 부분까지 아는 것’이 곧 ‘그 사람을 이해하는 길’이며, 이는 ‘소통’과 ‘공감’할 수 있는 능력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사벨의 정신 기능 가운데는 공감이라는 수준에서 이해하는 것을 포기하고, 그냥 우리의 차이를 존중하자는 슬픈 결정으로 만족해야 하는 영역들이 있었다. 왜 슬프냐고? 차이를 존중한다고 으스대며 말하는 것은 사실 자신이 이해할 수 없는 것, 따라서 솔직히 말하면 논리적으로 존중할 수 없는 것을 존중한다는 것이기 때문이다. 파악하지도 못하는 것의 가치를 어떻게 존중할 수 있단 말인가? (P. 327)
화자는 이사벨을 알아갈수록 모르는 것 역시 무한대로 커지는 아이러니한 상황에 부딪히고 만다. 결국 어느 지점에선 ‘서로의 차이를 존중’하자는 얘기로 두 손을 들고 마는 것이다. 그런데 과연 너와 나의 다름을 받아들인다(인정한다)는 ‘똘레랑스’ 정신이 연인 사이에도 적용될 수 있을까. 그것은 역설적이게도 ‘나는 널 도저히 이해 못하겠다’는 전제를 품에 안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차이를 존중 한다’는 건 (어차피 모든 걸 이해하진 못할 테니) 함께 지내기 위한 타협점을 만드는 것에 불과할지도 모르겠다.
더 우울한 결과로 나아가자면, 서로 존중하자고 약속한 그 ‘차이’가 균열을 일으키고, 끝내 관계의 종말로 이어진다는 것이다.
사랑이 식은 사람은 차버린 사람의 종교, 직업, 문학에 대한 취향을 헤어진 이유로 들지도 모르겠지만, 이것은 그 다음에 따라오는 부스러기 정보들, 즉 그 사람이 또 입 안 가득 뭘 넣은 채로 음료까지 꿀꺽꿀꺽 마셨다든가, 나이프와 포크를 대칭적으로 다시 놓지 않고 육즙을 빵 조각으로 닦아냈다든가 하는 것만 한 설명의 힘이 없다. 사람들은 직관적으로 이런 자잘한 것들이 그 전에 설명한 그 어떤 것보다도 관계가 끝나는 이유에 훨씬 가깝다는 것을 안다. (P. 112)
너무 사소해서 차마 말 할 수 없는 얘기들이 있다. 논리적으로는 표현할 수 없는 느낌들, 혹은 그냥 싫고 그냥 마음에 안 드는 것, 누가 들으면 “그게 뭐 어때서?”, “그게 왜?”라고 반문할 만한 얘기들... 이걸 취향의 문제라고 해야 할지, (내 방식대로 고치고 싶지만 꾹 참고) 받아들여야 할지 고민되는 순간이 찾아오게 마련인 것이다. 그러나 이런 속사정을 드러내는 순간, 치졸하거나 이기적이거나 자기만 잘난 줄 아는 사람으로 취급받을 위험을 감수해야 한다. 하나마나한 얘기지만, 이별에 분명한 이유를 댈 수 있는 경우가 얼마나 될까. 말로는 '이유 A’ 때문이라고 하지만 마음속에 감춰둔 '이유 B'가 있을 수도 있고, 상대방은 C 때문이 아닐까 생각하지만 정작 당사자는 A도 B도 C도 아닌 D 때문일 수도 있는 거다. 안타깝게도 당신이 왜 날 더 이상 사랑하지 않는지, 나는 당신이 왜 더 이상 사랑스럽게 보이지 않는지, 그 궁금해 미칠 거 같은 물음표는 각자 떠안아야할 몫인 거 같다. 호르몬이 어쩌고 하는 과학적 분석은 하나의 변명거리에 불과한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질문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진다. ‘나는 당신을 잘 알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내가 알고 있는 것’이 정말 맞긴 맞는 것인지, 과연 제대로 이해한 건지 헷갈리기 때문이다.
내가 왜 한 번도 머리를 올리지 않느냐고 묻자 그녀는 잠시 아무 말도 하지 않다가, 최종적이고 결정적인 답을 내놓았다.
“나도 왜 내가 머리를 올리지 않는지 모르겠어. 어쩌면 올려야 할지도 몰라. 어쩌면 그게 더 나을지도 몰라. 하지만 나는 안 그래. 나도 이유를 몰라. 그건 내가 왜 치즈를 정육면체로 자르는지, 내 우편번호의 끝자리가 무엇인지, 나무 빚을 어디서 샀는지, 직장까지 거리가 정확히 얼마나 되는지, 내 자명종에 어떤 배터리가 들어가는지, 왜 나는 화장실에서 뭘 못 읽는지 모르는 것과 마찬가지야. 나한테는 나도 이해 못하는 게 많아. 솔직히 말하면 이해하고 싶지 않은 것도 많고. 왜 너한테는 모든 게 그렇게 분명해야 하는지 모르겠어. 마치 사람들의 삶이 그 말도 안 되는 전기 안에 요약 정리될 수 있기라도 한 것처럼 말이야. 나한테는 나 자신도 납득할 수 없고 당연히 너한테도 납득이 안 될 괴상한 것들이 가득해. 나도 독서를 더 해야 한다는 건 알지만 TV보는 게 더 편해. 나한테 잘 대해주는 사람들을 사랑해야 한다는 것을 알지만, 툴툴거리는 사람들이 한번 달려 들어보고 싶다는 의욕을 자극해. 나는 동정심을 발휘하고 싶지만, 그럴 만큼 사람들을 좋아하지 않아. 행복해지고 싶지만, 행복이 사람을 멍청하게 만든다는 걸 알아. 대중교통을 이용하고 싶지만, 차가 더 편해. 아기를 낳고 싶지만, 어머니가 되는 게 무서워. 내 인생에서 뭔가 가치 있는 일을 해야 한다는 걸 알지만, 8시 15분이 지났기 때문에 이러다 지하철을 놓치는 게 아닌가 안달하고 있을 뿐이야.” 정적이 흘렀다.
“사실 우리도 그만 만나야 할 것 같아.”
더 오랜 정적이 흘렀다. 옆집 부엌의 싱크대가 트림을 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것도 자신할 수가 없어. 나도 그 이상은 모르겠어, 됐어? 맙소사, 완전히 지각이다. 내 외투 어디 있어?”
나는 겸허해진 마음으로 입을 다물었다. (P. 351)
나도 묻고 싶었다.
“당신은 날 안다고 말할 수 있을까. 나는 당신에 대해 뭘 알고 있을까. 만날 수 없는 평행선을 억지로 하나로 만들려 한 건 아닐까. 정말, 진심으로 서로 이해할 수 있을까. 난 나조차도 이해 못할 일들이 너무나 많은데.”
이렇게 쏟아내면, 내 말을 들은 상대방 역시 겸허해진 마음으로 입을 다물까.
사랑은 착각과 거짓말이라고 말하는 게 나을지도 모르겠다. ‘난 너에 대해 잘 알아’라는 착각, 그리고 ‘널 이해해’라는 거짓말.
책을 읽기 전으로 돌아가자면, 사랑에 대한 일종의 분석을 기대했던 내가 어리석었던 거 같다. 이미 알고 있는 거지만 모르는 척 했거나, 자세히 들여다보고 싶지 않았을 뿐이다. 그래서 저자 ‘알랭 드 보통’의 연애 공식이 더욱 쓰라리다. 지나간 상처 위에 타이핑이 쳐진다. <너에 대해 알고 싶어 → 난 널 알아 → 안다고 생각 했어 → 난 너에 대해 아는 걸까>
혹시 이 지난한 과정을 꿋꿋이 이겨내려는 연인이 있다면, 그 대답으론 홍상수 감독의 영화 제목이 정답인 듯하다. 냉소적이게도, <잘 알지도 못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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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ply한 번 더 읽 어 봐 요~~! 수정하기